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달성 고분군 (문단 편집) == 여담 == 일제시기에 고분들을 발굴하고 그 이후 개발되어 고분들이 사라졌기에 일제가 남긴 보고서가 유일하다. 이 당시 [[일본 제국|일제]]의 발굴 보고서는 [[지산동 고분군]]에 대한 것처럼 보고서가 두 장 짜리만 있는가 하면 제법 공을 들여서 쓴 것도 있었다. 다른 목적성이 있었다고 보이는 [[가야]]권이나 [[낙랑]]의 발굴과는 달리 소상히 발굴조사 보고서가 기술(記述)되어 있다.[* 일제 강점기의 관학자들의 연구들이 의도가 잘못되었을지언정 발굴조사 시스템은 당시 수준에서는 제법 높았다. 해방 이후의 한국의 문화재 관련 발굴조사 및 보고서 기술은 80~90년대 쯤 대학발굴이 흥기할 무렵에 일약 진전이 있었다. 60~70년대 발굴은 대부분 보고서나 서술적 측면에서 부족했었다.] 문화재에 대한 현대적인 인식 이전에 모든 고분들이 개발로 인해서 사라진 상황에서 --덕분에 문화재를 둘러싼 마찰은 없지만-- 유일하게 달성 고분군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어 관련 연구에서 ~~어쩔 수 없이~~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. 고분군이 우리 손에 의해 체계적인 발굴이 이뤄진 후 잘 보존되었다면 문화재 하나가 아쉬운 대구광역시에 큰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.[* 대구시가 주로 내세우는 역사 관련 관광 프로그램이 중구의 근대 골목과 [[동산병원]]의 선교사 건물들과 계산성당 등을 체험하는 '근대로의 여행'이다. 대구시가 근대 문화 컨텐츠를 밀어온 것은 대구의 근대 이전 역사 관련 유적 보호가 빈약하다는 한계점이 내포되어 있다.] 개발이 안되었다면 고분군을 달성과 연계하여 경주 시가지의 [[경주 월성|월성]]처럼 고대 문화를 살리고 [[중구(대구)|중구]] 경상 감영의 중세 문화를 거쳐 근대 골목에서 근대 문화까지 함께 체험하는 역사적인 도시가 되었을텐데 아쉬운 부분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